낙엽이 다 떨어져 길가에 소복히 쌓인 것과 대비되게 나무들은 앙상하게 나뭇가지만 남아있는 초겨울이다. 슬슬 졸업 오디션을 위한 곡을 구상하고 있었다. 어떤 테마가 좋을 지 어떻게 써야할지 열심히 생각을 해보고 또 직접 건반으로 옮겨봐도 감이 전혀 잡히지 않는다. 마사토는 나를 믿고 곡이 완성 되기를 기다려 주고있지만, 곡을 어떻게 써가야 할지 조차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나는 허공에다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아… 할 수 있을까? 이제 곧 졸업 오디션인데…”
곧이라고 해도 아직 크리스마스도 지나지 않았고
또 크리스마스는 연례행사인 크리스마스 파티가 남았다.
졸업 오디션까지 앞으로 3개월 정도… 실감이 나지 않는건
아니지만, 막막한 두려움에 벌써부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며칠동안 사오토메 학원에 등교를 해서도 하교를 한 뒤도
계속해서 곡을 적어 나갔다. 수북히 쌓인 악보들에 지나가는 학생들이 놀라는 것도 일상이 될 정도로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치만 왜 작업 하는지에 대한 생각은 안중에 없었다.
그저 졸업 오디션에 합격하기 위해. 그것만을 목표로 한채
곡을 쓰고 있었다. 난이도가 높은 곡을 써봐도, 반대로 내가 가장 잘 쓸 수 있는 곡을 써봐도 답이없다. 그렇게 어느새
크리스마스 이브가 다가왔다. 오늘은 사오토메 학원도 휴일이다. 마사토와 함께 보내고 싶어도 비밀연애를 들키면 안되기에 참아야만 하겠지…
그때였다 마사토에게서 전화가 오는게 아닌가. 수화기 넘어로 마사토가 말했다.
“괜찮다면 잠시 나와 함께 외출을 하지 않겠나?”
그의 의외와도 같은 말에 당황했지만, 곧내 알겠다고 답을 했다.
그러자 마사토는 사오토메 학원 정문에서 만나자고 했다.
알겠다고 말하곤 바로 준비를 해서 내려갔다.
바로라고 하기엔 마사토와의 외출이 너무 기대되서 화장도 하고 이쁜 옷도 갖추어 입고 나왔다. 정문에서 기다리고 있자니 마사토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자 검은색 차 한대가 이쪽으로 오더니 내 앞에서 멈춰섰다. 곧내 뒷좌석 문이 열리더니 익숙한 얼굴의 그가 내려서 나를 차에 태우는 것이 아닌가. 이런 에스코트는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그때 운전석에 백발에 수염이 가득한 차의 분위기하곤 다르게 전통의상을 입은 사람이 타고 있었다.
놀라서 쳐다보자. 그 사람은 마-군에게 말했다.
“도련님, 아무리 그래도 외출에 계집을 데려가시는 건 어떤가 싶습니다. 이 할아범과 단둘이 쇼핑은 싫으셨던 겁니까?”
“아니, 지이. 할아범하고 단둘이 하는 것도 좋지만 이번엔 셋이서 함께 가는 것도 좋지 않나. 그러고 그녀에게 계집이라는 말은 하지 말도록.”
“알겠습니다만, 계집을 계집이라고 부르지 어떻게 합니까”
거기에 나는 참지않고 대답했다.
“저는 호시노 아카리, 아카리라고 합니다! 계집 보다는 아카리라고 불러주실 수 있나요? 그리고 또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통성명을 하고 싶었던 것도 있고. 또 계집이라고 불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자 할아범이 무언가 더 말을 꺼내고 싶어하다가 말더니. 입을 닫았다. 그 모습을 보고 마사토는 할아범에게
“어이 할아범 그녀의 말을 무시하지 말도록.”
무시라고? 나 지금 무시당한거야? 울컥했지만 상대는 마사토의
집사이다. 어쩔 수 없이 입을 꾹 닫았다. 할아범은 마사토의 말을 듣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답했다.
“후지카와 라고 한다. 계집.”
“네 감사합니다. 후지카와 씨라고 부를게요.”
“호시… 네가 괜찮다면 뭐라 못하겠지만…”
마사토 귀에 작게 속삭였다.
“괜찮아! 처음봐서 그러시는 걸꺼야. 그리고 나이 많으신 분은 계집이라고 부르시는 분들도 꽤 있으니까.”
“그런가… 일단 알겠다. 할아범에 대한건 내가 대신 사과하도록 하지.”
그렇게 차가 향한 곳은 도심에 있는 백화점이었다.
마사토가 나를 차에서 내려주더니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평소보다 귀엽군. 나를 위해 애써 준건가?”
“응! 마-군을 위해서…
말하는 도중에 후지카와 씨가 차에서 내렸다. 뭔가 이 사람 앞에서 마사토하고 연애를 했다간 큰일이 날 것 같다는 생각에 입을 꾹 닫았다. 나의 모습에 마사토는 당황했지만 곧네 백화점 안으로 발을 옮겼다. 백화점 내에는 고급스럽게 꾸며져 있어서 나 같은게 와도 되는 곳인지를 걱정하게 될 정도였다.
마사토가 나의 손을 끌고 데려간 곳은 바로 드레스 샵이었다.
여기엔 왜…? 라는 물음이 앞섰지만 그래도 마사토가 데려와 준 곳이니까 웃으며 매장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때 마사토가 말했다.
“마음에 드는 드레스는 있나? 사실 크리스마스 파티 때 네가 입을 드레스를 골라주고 싶어서 그만…”
그의 말에 놀란 나머지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싫다면 다른 매장으로 이동하도록 하지. 너의 의사를 확인하지 않고 행동한 점 사과한다.”
그가 금방이라도 다른 매장으로 가자고 할 것 같다는 생각에
“아니, 괜찮아!! 오히려 마땅한 드레스가 없어서 사야했었어 고마워. 마-군”
나의 말에 그의 표정이 살아나는 것 같다. 어느새 활짝 웃으며 나에게 다가와 고맙다고 말했다.
“그러면 드레스를 골라봐야겠네. 뭐부터 입지? 아! 이거 이쁘다!!.”
나는 붉은색 머메이드 라인의 드레스를 집었다가 역시 너무 섹시한 느낌은 안어울릴 것 같아서 도로 내려놓았다.
한참을 고르다가 마사토 쪽을 바라봤더니. 마사토는 어떤 드레스 앞에 서서 고민을 하고 있는게 아닌가. 잘 봤더니 연한 호박색의 벨타입 드레스가 걸려 있었다. 마사토는 이런 취향이구나 싶어서 마사토 쪽으로 다가가 걸려있던 드레스를 잡았다. 마-군은 살짝 놀라더니 나를 보곤 물었다.
“그 드레스를 입을 건가…?”
“응! 시착도 되는 것 같더라고. 한번 입어봐도 될까…?”
“아아, 당연하지. 너라면 분명 어울릴 거다. (웃음)”
탈의실로 들어가서 입고 거울을 보는데. 밖으로 나가기 갑자기 부끄러워 졌다. 드레스는 이쁜데. 나도 이뻐보일까 싶어서 밖으로 못나가고 있던걸 직원의 손에 등을 떠밀려 결국 탈의실 밖으로 나가게 되었다. 기다리고 있던 마사토와 눈을 마주치자. 그는 한동안 말없이 나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났을까. 입을 열었다.
“아아, 엄청 잘 어울리는 군. 마치 천사가 내려온 것 같았다.”
그의 낯부끄러운 말에 고개를 푹 숙이곤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그때 문득 이 드레스의 가격이 얼마일까 궁금해서 가격표를 보니… 도저히 나의 저금해둔 돈으론 살 수 없는 가격이었다.
그래서 마사토에게 못살 것 같다고 이야기하려던 찰나. 마사토가 드레스를 구매하겠다고 하는게 아닌가. 미안함에 어쩔 줄을 몰라서 결국.
“괜찮아!! 안사도 돼! 나중에 내가 돈 모아서 살테니까…”
“아니, 이건 나로부터의 선물이다. 받아주도록.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네가 입은 모습을 보고싶다.”
그의 말에 어쩔 수 없이. 드레스를 받았지만 가슴이 무거웠다.
그리고 마사토를 따라 백화점 내의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또 근처의 카페에 앉아서 음료를 마시고 있었다. 음료를 마시는 내내 나는 마사토에게 너무 미안해서. 그리고 이런 내가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때 마사토가 말했다.
“히지리카와 재벌로 태어난 걸 잘했다고 생각하게 되는 하루였다. 이렇게 너에게 내가 원하는 것을 선물해 줄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의 긴 말이 유난히 마음에 걸린다. 하루였다고…? 그러면 마사토는 히지리카와 재벌의 장남인게 기쁘지 않다는 이야기인가…? 순간 무슨 말일까 궁금해서 물어봤다.
“마-군은 히지리카와 재벌의 장남으로 태어난게 기쁘지 않아?”
나의 물음에 그는 조금 곤란한 표정을 짓다가 말을 이었다.
“후회했던 나날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오토메 학원에 들어와 내가 하고싶었던 아이돌을 노리며 원하는 대로 살고있다. 그러니 지금은 …”
“지금은??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사오토메 학원을 다니도록 허락해준 건 1년이니까 말이다.”
“그러면 1년이 지나면?”
“다시 본가로 돌아가 집을 이어야겠지. 그게 나에게 내려진 사명과도 같은 거니까 말이야. 그래서 졸업 오디션을 우승해서 보여주고 싶다. 나의 꿈을.”
음악을 누구보다 좋아하는 그가 허락받은 시간은 단 1년, 그 이후에는 집을 이어야만 한다니 그건 너무 잔혹하잖아…나에게 힘을 준, 나를 구원해준 그의 노랫소리가 세상에 울려퍼지는 걸 보고 싶어. 다른 누군가도 마사토의 노랫소리를 듣고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마사토가 꿈을 이루어나가는 모습을 보고싶어… 그러니 나도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좋겠어. 그를 위해서.
얼음과 티백만이 남은 컵을 내려놓고 나는 마사토에게 말했다.
“내가, …도와줄게. 우승할 수 있게 노력할게… 부족한 나지만 마-군의 꿈을 응원하니까.”
나의 그런 말에 마사토는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고맙다. 그런 말을 해줘서. 네가 그래준다면 나도 더 힘내야겠군. 그러면 이만 돌아가도록 할까?”
그렇게 크리스마스 이브의 외출이 끝났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사오토메 학원에서 크리스마스 파티가 열렸다. 나는 마사토가 선물해준 드레스를 입고 파티에 참석했다. 하지만 마사토가 해준 그 말이 아직까지도 머릿속에 남아서 나를 괴롭혔다. 그때 수트를 입은 마사토가 나에게 다가오는게 아닌가. 그의 멋진 모습에 다시금 반할 것만 같았다.
“역시 잘 어울리는 군. 분명 네가 입어서 그런거다.”
“아니야. 마-군이야말로 엄청 멋진 걸…”
마사토가 나의 말을 듣고는 부끄러운 듯 답했다.
“그런가? 칭찬을 받으니 부끄럽군…”
나는 어제 마사토에게 들은 말을 다시금 곱씹으며 그에게
잠시 파티 회장의 테라스로 와줄 수 있냐고 말했다. 그러니 알았다고 나를 따라 나섰다. 다행히 파티 중이라 테라스에는 아무도 없었고 나는 그곳에서 마사토에게 내가 줄곧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내가 마-군을 위해서 작곡한다고 했었지? 나는 진심이니까.
마사토를 무조건 데뷔시키고 싶어!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나는 마사토의 파트너니까. 나와 같이 정상을 노리자. 우리 둘이면 분명 할 수 있어!… 어때?”
나의 말에 마사토가 놀라는 눈치였지만 곧네 미소를 띄우곤 답했다.
“당연하지. 졸업 오디션에서 우승하는 건 우리다. 네가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다. 덕분에 힘이 생겼다. 감사하지.”
“그리고…마-군이 설령 혼약자가 있다고 한들 난 괜찮아.
비밀 연애로 끝나더라도 괜찮아. 나는 마-군이 꿈을 이루는게 가장 중요하니까. 혹시 신경쓰고 있다면 걱정하지말아도 돼.”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숙였다. 마사토의 얼굴을 도저히 바라볼 수 없어서…그래서 나는 고개를 숙인채 가만히 서있었다. 그때 머리 넘어로 마사토가 입을 열었다.
“알고 있으면서도… 너는 나를 지금까지 믿어준건가…? 나도 원치않는 결혼따위 하기 싫다. 된다면 …(작게) 너를…, 그러니 걱정 말도록.”
그렇게 말하고는 나를 끌어안았다. 커튼에 가려져 파티회장에선 우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잠시동안 우리는 끌어안고 있었다.
이 사랑이 계속 이어져 나가기를 바라며 서로를 끌어안은채로 눈이 내리는 사오토메 학원을 바라보았다. 마음속에 불타오르는 졸업 오디션 우승에 대한 열망을 품은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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